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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정를 뛰어넘은 결과물 <암수살인> 대박
    카테고리 없음 2020. 2. 1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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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이 좋았다.<자웅 살인>(2017)을 보면서 계속 그 소견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 영화는 수없이 '만약'을 돌아보며 우직하게 나의 길을 가는 영화다. 가끔 촌스러울 때도 있고, 딱딱하고 기본에 충실한 연출처럼 느끼기도 하죠. 그러나 중요한 순간 서사의 행방을 판정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고 결국 운, 즉 우연이었다. 당연히 서사적으로는 뚜렷한 흐름이라고 해도 크게 잡을 예기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영화가 문재가 아니라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밝혀지지 않은 문재 자체보다는 인물의 기억, 상상, 미답의 길에 대한 현실성을 재연한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송경수 형사가 가지 못한 미래 형사 현민(김윤석)이 뒤늦게 사진 속에서 여성용 피입니다.기구루프를 발견한 것은 집요한 수사와 끊임없이 의혹이 쌓인 결실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갑자기 던져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암수 살인>의 건실한 내러티브는 퍼즐 같은 단서를 뿌려 이를 연결하는 화려한 두뇌 게이입니다. 형민은 증거를 원하지만 증거를 쫓는 사람은 아니다. 형민이 테오(주지훈)의 거짓말 예기를 들춰내고 진짜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에는 테오가 연쇄살인범이라는 내적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예기하고, 이것은 결과를 기이하게 결정하고, 거기에 이르는 과정을 거쳐 가는 영화다. 다른 형사가 그 길로 가지 못하는 것은 확신이 부족하고 감히 손해를 감수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형민은 다소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할 겁니다. 아내와 사별하고 가족부양의 책입니다에서 자유롭고 부유한 형제 덕에 재산도 비교적 넉넉하다. 형사영화의 클리셰를 친국어적인 신선한 캐릭터다. 동시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지만 장르적 내러티브 속에서는 매우 비현실적인 인물이었다. 형사의 소명이라는 영화의 목표지점을 위해 정확히 설계됐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이상적인 포지션이었기 때문이었다.범인은 각본을 쓰다. 형사과장은 형민에게 유령 같은 문재를 쫓아다니다가 기회가 있는 형사를 여럿 봤다고 경고한다. 형민은 테오에게 한번 농락당한 뒤 형사과장이 언급한 퇴직경찰 손경수(주진모)를 찾아간다. 송경수는 모두가 예상하는 형민의 미래이자 암수 살인의 문재에 뛰어든 다른 형사의 현재다. <자웅 살인>에는 정확히 지시된 실물이 2회 등장할 것입니다. 한 번은 손경수 전 형사의 입에서, 다른 하나는 테오의 진술을 통해서다. 테오는 감방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서 왜 자백을 하느냐는 형민의 물소음에 그렇지?감방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라고 대답할 겁니다. 이 기예는 진짜다 송경수는 고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 문재의 불입증을 통해 현재의 문재까지 무죄 판결을 받아내려는 테오의 예정을 알린다. 이것도 사실이었다 정리하자면, 이 영화는 범인이 붙잡힌 시점부터 시작될 뿐 아니라 모든 밑그림과 설계도까지 모두 숨기고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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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형사는 각본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좋은 때에 결정한 결과, 즉 테오가 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근거를 부지런히 모을 뿐이었다. 형민이 테오를 범인으로 확신한 근거는 딱 한 번 나온다. 사람 끊어 본 놈이다. 그게 아니구나.구체적으로 말하는 거야.형민은 경험과 감에 의존해 테오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믿는다. 그게 전부다. 현민에는 충분한지도 모르지만 관객을 설득하는데 없어서, 영화는 여기에 동력을 1더 줄것입니다. 테오가 살해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실종자 지희의 할머니와 형민을 만나게 해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라는 명분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었다. 가장 작은 동기, 가장 작은 확신, 가장 작은 대의명분. 특별한 영화적 형식으로 메시지를 포장하지 않고 별다른 극적 고양을 시도하지 않는 이 고지식한 영화가 이런 허술한 나라티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관객을 빨아들이는 힘을 얻는 것은 약 2개 반칙 때문일 것이다. 1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는 명분, 다른 1은 이 영화의 유 1한 형식적 트릭 플래시백였던<'자웅 살인'스릴러, 서스펜스 장르적 관습과 트릭을 소비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데이비드 핀 조가<조디악(2007)처럼 시대의 혼란을 반영하고 인간 내면의 어둠을 깊이 파고들다 영화도 아니다. 실패한 많은 송 경수를 딛고 그래도 아직 형사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예비 송 경수에게 바라는 1종의 판타지에 가깝다. 사실 자웅 살인사건을 해결했습니다라는 실화는 사건의 리얼리티를 구축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건이 해결되는 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운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영화 역시 아무런 복선 없는 사건 해결에서 이를 거듭 인정한다. 근거가 거의 없는 자웅 살인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해결하는 것도 어느 1종의 확률 게임이었다 그래서 형민이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게 중요하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확률적으로 무수한 실패를 전제로 할 것입니다. 결미<자웅 살인>가 제공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캐릭터 현민을 통한 1종의 대리 만족이었다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사실상 몰락한 형사 송교은스으로 마무리됐다. 확률적으로 보면 송경수야 스토리로 암수살인사건의 현실이고, 결국 테오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킨 형민은 매우 희소한 확률로 존재하는 형사라는 직업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이상향인 셈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이 영화 리얼리티의 근거가 되기보다 오히려 이상적인 목표지점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키는 근거로 작용할 것입니다. 저는 송경수와 현민의 관계가 이 영화가 플래시백을 활용하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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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연과 재현과 체현의 온도차 영화 역시 다른 반칙, 플래시백은 교과서처럼 딱딱한 이 영화에 긴장감과 끈기를 유지시키는 거의 유일한 수단입니다. 지루하고 이상적인 캐릭터를 솔직하게 따라가는 연출은 사실 그렇게 분석할 것도 없을 정도로 평이하다. 그 자신 마테오의 증언을 기점으로 진행되는 사고의 재연, 플래시백이 트릭 역할을 해 관객의 착각을 유도함으로써 긴장을 유지하고 자신감을 가진다. 기본적으로 플래시백은 과거의 많은 재연입니다. 이 이야기로 푸는 대신 앞서 보여주는 순간 관객은 화면의 리얼리티를 따라가는 겁니다. 그것이 플래시백의 첫번째 목적입니다. 테오가 자랑하는 2건의 살인이 플래시백으로 삽입되면 당연히 그 사코웅 과거 많이 재연으로 인식된다. <암수 살인>은 요기에 트릭을 건다. 후반부에 사실 그게 있었던 게 아니라 테오의 거짓말 이야기, 역시 형민이 증언을 듣고 그린 상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재연과 환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거죠. 나는 이 플래시백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과거를 재연하는 것만이 아니라 플래시백으로 제시된 영상이 인물의 기분을 반영하는 형식적인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플래시백이 재연되고 어떤 플래시백이 환상인지를 확신하는 과정이 영화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아내 Sound에게는 이런 연출 방식의 효용을 분석하고, 이 글을 전개해 자신감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암수살인>이 유족의 동의를 받지 않고 실제 사고 중 하나를 묘사했다는 소송이 제기되면서 심각한 상념에 빠졌다. 영화 속의 세번째의 플래시백, 20하나 2년 부평동 거의 매일 살인사의 고은 실은 테오의 거짓말이 예상에 꾸며낸 상상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 레퍼런스를 실제 사고에서 빌려 재현해 버렸다. 즉 환상을 그리면서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기이한 일을 저질렀다. 물론 단순하게는 상황의 리얼리티를 위해 취재 과정에서 얻은 소스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환상과 실제 재연과 상상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으로 플래시백을 활용한 이 영화에서는 매우 심각한 분열을 예고한다.플래시백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많은 "재연"입니다. 내러티브 중간시제를 돌려버리는 이 형식은 1차적으로는 설명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시제를 자주 뒤섞고 가끔 환상과 비전까지 삽입시키면 전혀 다른 형식으로 변모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주 사용하는 플래시백이 이에 해당한다. 만약<설리:허드슨 강의 기적>(2006이하<설리>)에서 이스트우드는 5번의 플래시백을 사용하지만 악몽과 환영에 전 달리는 썰매의 모습을 함께 제시한다. 덕분에 샐리에서의 플래시백은 물 밑의 시점에서 재연됐는지, 언제 삽입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어떤 플래시백이 샐리의 기억으로, 어떤 플래시백이 객관적인 사실인지를 구분하는 가운데 유령처럼 부유하는 인물의 느낌(불안과 부다sound감)이 관객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플래시백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도 중요하다. <샐리>의 플래시백은 환상, 현실과 구별되지 않고 같은 톤으로 제시된다. 한편<자웅 살인>에서는 플래시백으로 착각된 상상 장면이 왜곡이 심한 아이 군 모픽렝즈을 활용하고"컬러풀하고 몽환적인 느낌"(<씨네 2개>하나하나 75호 기획'황 키속 촬영 감독의<자웅 살인>포토 코멘터리')으로 묘사된다. 상상은 왜곡된 선구자이며 실제로는 건조하게 묘사하는 도식적인 구분입니다. 이를 정반대로 활용한 영화도 있다. 링 램지 감독의<너는 여기에 없었다>(20하나 7)에서는 플래시백의 과거를 선명하게 현재를 건조하고 불투명하게 촬영하고 과거의 많은 상처와 환상 속에 갇혀서 사는 인물을 포효은했습니다. 불의의 살인으로 플래시백 촬영의 차이를 둔 것은 상상(하나도 모르는 재현)과 현실을 구분하기 위한 직관적 수단입니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 암수살인은 테오의 거짓말이 자기 형민의 상상을 재현할 때, 실제 일어난 사고를 재연할 때 촬영 방식을 차등화하지 않고 섞는다. 이는 처음부터 생각했던 상상과 재연을 섞는 속임수 효과로 작동하지만 인물의 심정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영화가 이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자신을 구분하는 소견이 없는 것 같다. 원래 플래시백은 당연한 시점이 주인이 제시되어야 한다. 졸개 플래시백인지, 졸개 기억인지의 문재는 중요하다. 단순히 과거를 재연할 때는 신의 관점 하나이며, 특정인의 시점으로 한정시켜 기억의 왜곡과 인물의 갈등을 묘사할 수도 있다. 언뜻 관심 있는 플래시백의 활용처럼 보였던 <암수 살인>은 이 차이를 구분할 수 없어 급격히 편해진다. 그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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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암수살인>의 돌파구는 의외의 지점에서 열린다. 이미 말했듯이 영화는 실화에 기초하고 있지만 사실은 판타지적 비전을 제시하는 영화에 가깝다. 태오와 형민 역시 캐릭터의 변천을 정말 거의 보여주지 않고 직진하는 인물이었다. 굳이 비교하면, 이 영화는 <조디악>보다는 <사리>와 비슷하다. 드라마 설리가 고인의 직장에서 일을 제대로 수행하는 평범한 영웅을 그렸다면 암수살인 역시 변하지 않는 인물을 통해 소명의식을 부각시킨다. <설리>는 설리의 꿈과 환상, 기억을 묘사할 때 굳이 톤을 구분하지 않고 설리의 우울과 시대의 불안을 그리며 과인하고 있다. <암수살인>은 현실과 플래시백은 구별하는 반면, 플래시백 영역에서는 상상의 재현과 사실의 재연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감정적인 시제를 공유한다. 그 결과 지나치게 과거의 재연과 상상의 재현, 시대의 체현 사이에서 발발하는, 비록 발발할 것이 뻔한 거리감을 관객 스스로 찾아내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밋밋할 수밖에 없는 서사와 연출, 변천하지 않은 캐릭터들이 의외의 입체성을 띠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이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처럼 보이지만 장르적 속임수와는 또 다른 결말로 관객을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명제에 동참시킨다. <암수 살인>은 무수히 존재했을 손경수 형사가 가보지 못한 길을 대신 상상해 주는 환상의 플래시백 같은 영화다. 물론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실제 문재를 단지 리얼리티의 재료로 소비하는 등 실수도 범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안이한 접근이 오히려 본래의 의도보다 입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통로를 연 게 아닌가 싶다. 새삼스럽게 운이 좋았다.


    시네 2일 www.cine2일.com문 선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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